티스토리 뷰
장벽을 사이에 두고 두 부족이 대립을 하고 있다. 한편에는 버터를 빵 위쪽에 발라 먹는 유크족 (Yooks)이, 그리고 반대편에는 버터를 빵 아래쪽에 발라 먹는 주크족 (Zooks)이 살았다. 같은 언어를 쓰는데도 분단된 상태에서 서로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유크족인 한 할아버지는 그의 손주에게 주크족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으며 말했다. 버터를 빵 아래쪽에 발라 먹는 주크족은 영혼이 비틀린 녀석들이야. 버터는 빵 위쪽에 발라 먹는 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법이지 않겠니. 그래서 나는 젊은 나이에 국경수비대를 지원했단다. 주크족 놈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째깍-열매 채찍을 들고 말이야! 그러던 어느날 주크족의 반이치라는 놈이 새총으로 째깍-열매 채찍을 부러뜨렸지 뭐니.
+
버터 전쟁은 이렇게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유크족 본부가 개발한 3 연발 새총을 받고 다시 장벽으로 향했다. 이것으로 우위를 확실히 점할 수 있다고 할아버지는 믿었다. 하지만 곧 반이치는 3 연발 새총보다 더 뛰어난 3 연발 투석기를 가져와 역공을 펼쳤다. 낙심한 할아버지는 유크족 본부로 돌아가는데, 얼마 안 있어 고성능 폭탄을 잔뜩 짊어진 강아지를 데리고 반격을 시도한다. 이에 질세라 주크족은 그보다 더 많은 수의 폭탄을 실은 코끼리를 전투에 투입한다. 여기에 맞서 할아버지는 무기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로봇을 타고 장벽으로 달려갔지만 그것은 반이치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유크족과 주크족 간의 군비 경쟁이 심화되는 동안 할아버지는 장군으로 진급하게 된다. 싸우자, 싸우자, 모두가 버터를 빵 위쪽에 발라 먹는 날까지! 그는 유크족 응원단을 뚫고 전장을 향해 용맹하게 전진했다.
+
하지만 버터 전쟁은 일종의 교착 상태에 접어든다. 그런 와중에 유크족 본부에서는 최종 병기인 빅 보이 부메루 (Big Boy Boomeroo)의 개발에 성공했다고 할아버지에게 알린다. 이 콩알 만한 크기의 무기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지닌 것으로 하나만 땅에 떨어져도 주크족은 끝이었다. 빅 보이 부메루를 손에 쥐고 장벽으로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주변 풍경은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유크족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지하로 대피하고 있었다. 장벽에 도달했을 때 그는 그의 손자를 발견하고는 말한다. 잘 보아라, 손자야. 할아버지는 이제 버터 전쟁을 끝내려고 한단다. 역사적인 날이 될 거야! 그러나 그는 그 순간 주크족 사람들 역시 대피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멀리서 반이치가 걸어온다. 그의 손에도 빅 보이 부메루가 쥐어져 있다. 그 둘은 상대방이 허튼 짓을 하면 그것을 떨어뜨리겠다고 협박한다. 누가 먼저 떨어뜨릴까요? 손자의 질문에 할아버지는 답한다. 글쎄, 지켜보자꾸나.
+
1984년 랜덤 하우스에서 출판된 닥터 수스 (Dr. Seuss)의 어린이 동화책. 탁월한 리듬과 운(韻)으로 이루어진 문장들, 알록달록하고도 전위적인 일러스트, 그리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스토리 등으로 독자들을 사로 잡은 닥터 수스였지만 정치적인 소재를 채택하는 것에도 거침 없었다. 냉전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던 시점에서 나오게 된 <버터 전쟁 책>은 출판 직후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버터를 빵의 어느 쪽에 바를 것인지로 시작되는 이데올로기 갈등, 유크족과 주크족의 계속 되는 무기 증강과 프로파간다, 그리고 대량 살상 무기인 빅 보이 부메루, 즉 핵폭탄의 등장까지, <버터 전쟁 책>은 매우 노골적으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비꼬고 있다. 특히 누가 먼저 빅 보이 부메루를 떨어뜨릴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야기를 종료시키는 대목은 어른이 봐도 소름끼친다. 이러한 열린 결말이 어린이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혼란스럽다. 유크족과 주크족이 정말 다른 걸까? 누가 널 때리면 너도 같이 싸워야 할까? 너는 할아버지가 하신 일이 옳았다고 생각하니? 이런 질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 건드리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
닥터 수스라는 동화 작가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그의 본명은 시어도어 가이젤. 1904년 미국에서 태어났고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뒤 그는 <베니티 페어>나 <라이프> 같은 잡지들에서 만화를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그는 <뉴욕 시티>와 <PM>이라는 리버럴 성향의 일간지들에 만평을 기고했다. 닥터 수스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풍자했고 전쟁 채권과 우표 판매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가 본격적으로 어린이 동화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 후로부터 몇 년 후였다. 57년에 <모자 속의 고양이 (The Cat in the Hat)>을 필두로 <그린치 (How Grinch Stole Christmas)>, <녹색 달걀과 햄 (Green Eggs and Ham)>, <호튼 (Horton Hears a Who!)>, <로렉스 (The Lorax)> 등의 작품들을 발표했고, 이들 중 많은 작품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버터 전쟁 책>과 마찬가지로 닥터 수스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의 정치적 견해를 숨기지 않았는데, 예컨대 <그린치>에서는 파시즘을 비판했고 그리고 <로렉스>에서는 환경 문제를 다루어서 화제가 되었다.
+
다시 <버터 전쟁 책>으로 돌아와보자. 빅 보이 부메루가 등장하자 전쟁의 양상은 매우 달라진다. 그전까지의 무기들과 빅 보이 부메루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데, 유크족 사람들이 지하로 대피하는 대목에서 그 점이 명백해진다. 즉 빅 보이 부메루의 파괴력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주크족은 물론이고 유크족 또한 그 피해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 상황에서 주크족 역시 빅 보이 부메루를 최후의 카드로 꺼내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상호 확증 파괴 (Mutually Assured Destruction, MAD)가 성립되는 순간이다.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 양국이 적용했던 전략으로, 상대방이 선제공격을 감행해서 피해를 입더라도 핵무기로 보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여 이를 사전에 억제한다는 개념이다. 닥터 수스가 두려워한 것은 이러한 팽팽한 균형이 깨졌을 때 닥쳐올 재앙이다. 하지만 역사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