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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아래에는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은 기독교 성서 중 "전도서"에서 저자가 '오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과거에도 있었고 훗날에도 있을 것'이라며 한탄하는 중에 하는 말이다. 2000년도 더 전에 사람들은 이미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날은 '그때는 문명의 발전 속도가 느려서 그렇고 현대 문명에는 과거에 없던 것들로 가득해'라고 생각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확실히 물건의 가짓수는 더 많은지도 모른다. (단언컨대 더 많다.) 하지만 그 수 많은 물건들을 이용해서 인간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수 천년간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보화 시대의 "신진" 문물인 '태블릿'을 살펴보자.


Last time there was this much excitement about a tablet, it had some commandments written on it.


계명이 새겨진 판 이후로 사람들이 판(태블릿)에 이렇게 열광한 적이 없었다.


— Wall Street Journal (2009년 잡스의 아이패드 발표회에 빗대어)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 속에서 십계명을 들고 타락한 유대인들을 심판하고 있는 모세는 기원전 14세기에 활동하던 인물이다. 21세기의 빛나는 발명품을 고대의 석판에 비유하는 것은 기자가 의도한 언어유희 이상의 시사점이 있는 것 같다.


프랑스 라스코 동굴에서 발견된 석기시대 벽화는 문자도 없던 시절인 기원전 15,000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평평한 표면(surface)에 정보를 저장하고 소비하는 행동 양식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수메르인들은 이미 기원전 3000년경에 점토 태블릿에 갈대 스타일러스로 글을 썼다. Credit: Nelson's New Illustrated Bible Manners and Customs


'스타일러스가 있으면 태블릿은 끝이다'라던 스티브 잡스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태블릿과 스타일러스는 한 세트다. 사람이 휴대가 편리한 적당한 크기의 판과 가느다란 막대를 함께 들고 있는 풍경은 유사 이래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있어왔다.


글을 쓰고 있는 고대 이집트의 서기관 Credit: National Geographic


고대 그리스의 학교 풍경을 묘사한 그림. 고대 그리스인들이 노트북을 사용했다는 증거라며 논란 아닌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대표적인 태블릿과 스타일러스 Credit: Susie Ochs, Macworld


We didn’t really do a stylus, we did a Pencil.


우리는 스타일러스가 아니고 연필을 만들었습니다.


— Tim Cook, Apple CEO (아이패드 프로에 대한 Independent지와의 인터뷰에서)

옆길로 새는 얘기지만 애플 펜슬은 팀 쿡이 뭐라고 해도 연필이 아니라 스타일러스다.


태블릿과 스타일러스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왔던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널리 쓰이는 "태블릿"과 "스타일러스"라는 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태블릿과 스타일러스를 든 여성을 그린 1세기 프레스코화. Naples Archaeological Museum 소장


폼페이에서 발견 된 고대 로마의 유물 중에는 태블릿과 스타일러스를 든 그림이 몇 점 발견되었는데, 추정키로는 자신들의 긴 가방끈을 과시하기 위한 시각적 장치라고 한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필기구들을 타불라(tabula)와 스틸루스(stilus)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tablet과 stylus의 어원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단어 tablet의 경우, "판"을 뜻하는 라틴어 tabula에 이어 "글쓰기를 위한 판이나 평평한 표면 "를 뜻하는 14세기 고대 불어 "tablete"을 거쳐 내려온 말이다. 참고로 tabula는 table의 어원이기도 하다. Stylus의 경우는 "기둥"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stylos, "첨필"을 의미하는 라틴어 stilus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 Stilus는 필체, 문체 등으로 의미가 확장되어서, style의 어원이 되기도 하였다.


로마시대의 밀랍 타불라와 스틸루스 재현품 Credit: Peter van der Sluijs


점토나 돌에 글을 새기던 고대 중동의 문명들 처럼 로마인들이 종이가 없어서 태블릿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로 부터 전래한 파피루스는 이미 로마 각지에서 생산되고 있었지만 결국 문제는 비용에 있었다. 종이는 아직 사치품이었던 것. 가축의 가죽을 이용하는 양피지 등도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사용한 것이 밀랍이다. 가격도 싸고, 조금만 열을 가하면 글을 지울 수 있었기 때문에 재활용하기도 매우 용이했다. 이러한 밀랍 태블릿을 케래(cerae)라고 불렀다고 하며, 학교나 간단한 메모를 하는데 널리 이용되었다고 한다.


첨언하자면 "깨끗한 태블릿"을 의미하는 "타불라 라사" (tabula rasa)는, 오늘날 철학적 개념인 "빈 서판" (clean slate)으로 쓰이고 있다.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 여성 (?) Credit: Getty's Image


달에 사람을 보내는 현대인들이 아직까지도 태블릿과 스타일러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 해 보면 새삼 신비스럽다. 우리가 고대 문명에서 이러한 의외의 익숙함을 느끼는 것 처럼, 고대인들도 만약 미래에 온다면 생각보다 익숙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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